쉼표 여행
가을빛이 내려앉은 도시
정읍에서 만나는
단풍과 서정의 길
한 겹, 또 한 겹. 계절이 색을 더해 갈수록 정읍은 깊어진다.
내장산국립공원의 단풍 능선과 물 위에 떠 있는 우화정, 하얀 꽃물결로 물드는 구절초 지방정원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무성서원까지.
사색과 산책이 동시에 어울리는 길 위에서, 우리는 가을의 결을 천천히 어루만진다.
글. 편집실
내장산으로 오르는 길목을 걷다 보면 연못 한가운데 떠 있는 ‘우화정’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잔잔한 수면 위로 정자와 단풍이 겹쳐 비치는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를 닮았다. 우화정(羽化亭)이라는 이름은 ‘정자에 날개가 돋아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에서 지어졌다.
우화정은 접근성 좋은 산책로와 포토존이 잘 정돈되어 있어 초보 여행자도 부담 없이 찾기 좋다. 연못 가장자리 데크에서 정자와 단풍의 반영을 함께 담기 좋다. 이곳에서 잠깐 숨을 고른 뒤 다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일주문부터 108그루의 단풍나무가 만들어 낸 터널이 이어진다.
단풍으로 가득한 터널 끝에 다다르면 내장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내장사는 백제 무왕 37년(636)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여러 차례의 전란과 화재를 거치면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켰고, 이제는 그러한 시간을 품은 채 여행자를 맞이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사찰의 매력은 자연과 건축이 서로를 과장하지 않는 데 있다. 오래된 기둥과 낮은 처마, 마당의 바람까지 모두 과장 없이 단정하다.
내장산국립공원은 정읍 가을 여행의 핵심 무대다. 산자락을 따라 단풍 군락이 이어지고, 능선에서는 정읍 시내와 주변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초가을에는 녹색과 황색의 대비가 뚜렷하고, 절정기에 들어서면 붉은색 스펙트럼이 깊어진다.
내장산은 직접 오르는 것도 좋지만 케이블카를 통해서도 즐길 수 있다. 발아래 병풍처럼 늘어진 능선과 단풍 물결이 한눈에 펼쳐져 왜 내장산이 ‘단풍 1번지’임을 실감하게 된다. 내장산 탐방안내소에서 출발하는 케이블카를 타고 상부 정류장에서 내려 약 300m만 더 걸으면 연자봉 전망대까지도 금방이다. 노을 질 무렵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가을 단풍과 붉게 물든 하늘이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른다. 케이블카는 계절과 기상 상황에 따라 운행 시간이 조금씩 달라지니 미리 알아보고 가는 것이 좋다. 트레킹을 겸한다면 왕복 1~1.5시간 내외로 가볍게 다녀올 만한 코스도 있다. 케이블카 탑승 전 안내센터에서 내장산 전체 모습을 미리 살펴보면 산세가 머릿속에 그려져 걷는 재미가 배가된다.
정읍의 가을은 붉은색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바로 추령천 옆 너른 숲과 언덕을 하얗게 덮은 구절초 때문이다. 가을이 되면 소나무 숲 아래로 펼쳐진 구절초 군락이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낸다.
‘정읍 구절초 지방정원’은 전라북도 제1호 지방정원으로 지정된 곳으로,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 숲과 하천을 따라 자리한 지방정원에 들어서자마자 공기가 달콤해진다. 짙은 숲 냄새에 구절초꽃의 향기가 엷게 섞여 코끝을 스친다. 구절초꽃은 가까이서 보면 꽃잎이 바늘 끝처럼 가늘지만, 그 군락은 멀리서 보면 새하얀 파도처럼 산자락을 타듯 이어지는 모습이다. 군락 사이로 난 오솔길을 천천히 걸으면 발목부터 어깨까지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진다.
정원은 들꽃정원, 물결정원, 참여정원, 출렁다리로 이어지는 1시간 남짓 산책 코스를 천천히 걸으며 사색에 빠지기에도 좋다. 최근에는 부치봉 정상에서 출발해 구절초 정원과 추령천을 내려다보며 550m 구간을 활강하는 ‘구절초 집와이어’가 개장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스릴을 동시에 느끼는 색다른 즐거움도 선사하고 있다.
오래된 은행나무들이 둘러싼 무성서원은 1615년에 세워진 서원이다. 신라의 사상가 최치원과 조선 시대 선비 신잠을 함께 모시고 있는 곳으로 조선 성리학의 교육 전통과 공간 구조를 잘 간직해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담장과 강당, 사당이 간결하게 조성된 마당을 걷다 보면, 배움과 예(禮)를 일상에서 실천하던 옛사람들의 시간을 고요히 느낄 수 있다.
무성서원은 깊은 산중이 아니라 정읍의 서쪽 들녘에 있다. 그래서일까. 서원으로 들어서는 길에 밭 냄새와 흙냄새가 먼저 난다.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오래된 은행나무가 서원을 지키듯 서 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잎사귀들이 작은 종처럼 흔들린다. 은행잎을 사각사각 밟으며 마당 한 바퀴만 돌아도 무언가가 마음을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서원의 모습은 화려함보다 단정함에 가깝다. 가을이면 마당이 노란 물결로 덮이고, 그 위로 낮은 처마와 단정한 기둥이 선을 잇는다. 화려함보다는 절제, 과시보다는 균형의 미학이 엿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