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을
만나다

글. 김채은
사진. 김병구

"아버지의 이름 석 자에 결코 누가 되지 않도록 부끄럼 없이 살아가고 싶습니다.
지금은 제 자리에서 묵묵히 작은 힘을 보태는 정도이지만, 퇴직 후에는 아버지가 평생 보여주셨던 봉사의 마음을 온전히 이어가고 싶습니다."



초록 모자와 삽으로 일군 40년
아버지의 마음을 삶에 새기다

이승우 고(故) 이찬규 전 충북 옥천군 군북면협의회장 유족


어릴 적 승우 씨에게 아버지는 조금 특별한 존재였다. 기억 속 아버지는 늘 초록색 모자를 쓰고 삽을 든 채 이른 새벽부터 마을 구석구석을 누비곤 했다. 그때는 그저 바쁜 아버지로만 여겼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바쁜 발걸음이 향했던 곳과 그 안에 담긴 진심을 하나둘 깨닫게 됐다. 군북면협의회 초대 회장을 시작으로 40여 년간 새마을운동과 지역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친 고(故) 이찬규 전 회장. 그 묵묵한 발자취를 지켜보며 자란 막내아들 이승우씨는 어느새 아버지가 품었던 따뜻한 공동체 정신을 자신의 삶에 조용히 들이고 있다.






총 대신 삽을 든 어린 날의 아버지

이승우 씨의 어린 시절은 늘 새마을운동과 맞닿아 있었다. 아침이면 마을 어딘가에서 새마을노래가 울려 퍼졌고, 주말이면 아이들도 구역을 나누어 동네 골목을 쓸고 닦았다. 온 주민이 모여 체육대회를 열고, 농번기에는 서로의 논을 오가며 모내기를 도왔던 풍경은 그 시절 당연한 일상이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아버지 이찬규 새마을지도자가 있었다. 새마을 활동이 있는 날이면 꼭두새벽부터 집을 나섰고, 모내기 철이면 주민들이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누구보다 먼저 논으로 향했다. 못줄을 챙기고 모를 준비해 경운기로 옮기는 일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어린 승우 씨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집에서 보다 마을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특히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민방위복을 입고 삽을 든 채 마을에 모여 대열을 맞춰 움직이던 아버지의 모습은 영락없는 군인처럼 보였다. 훗날에야 그 모습이 새마을지도자 교육의 한 장면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고 이찬규 전 회장은 1971년 새마을지도자로 첫발을 내디딘 이후, 군북면협의회 초대 회장과 옥천군새마을회 지회장을 역임하며 40여 년간 지역 봉사와 주민 화합, 환경정비 등에 앞장섰다. 부추 재배 확대와 작목반 육성을 통해 농가 소득 증대에 기여한 공로로 두 차례 대통령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후에는 제1대 옥천군의회 의원과 제2대 옥천군의회 후반기 부의장을 지내며 주민들의 목소리가 지역 행정에 생생하게 닿도록 든든한 다리 역할을 해냈다.
“어릴 적엔 아버지가 마을을 지키는 군인인 줄 알았어요. 다만 총 대신 대신 삽을 들고, 군모 대신 초록색 새마을 모자를 쓰고 계셨죠. 지금도 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언제나 새마을 활동에 진심이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때는 너무 익숙해서 잘 몰랐지만, 이제 와 돌아보니 정말 새마을을 위해 태어나신 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달은 40년의 무게

아버지가 마을 일에 온 마음을 쏟는 시간이 길었던 만큼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 늦은 밤에야 돌아오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일곱 남매가 나란히 여행을 떠난 기억조차 손에 꼽을 정도였다. 막내아들 승우 씨 역시 당시 아버지에게 섭섭한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라고 털어놓는다. 그럼에도 아버지와 함께 나눈 소박한 추억들은 여전히 선명하다. 낚시를 좋아하던 아버지를 따라 개울가로 나가 제대로된 낚싯대 하나 없이 철사로 물고기를 잡던 그날은 승우 씨가 꼽는 행복한 어린 시절의 풍경이다.
그 시절 승우 씨는 아버지가 이룬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미처 알지 못했다. 시골집 거실에 가득 놓인 상패가 어느 집에나 있는 흔한 풍경인 줄 알았고, 대통령에게 훈장을 받고 악수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도 어린 눈에는 그저 평범한 액자 하나로 보였다. 하지만 자라나 직접 공직에 몸담고 지역 행정을 경험하면서 그 40년 세월이 얼마나 무겁고 치열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한 분야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수십 년을 버텨낸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도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걸어온 삶의 진가를 가슴 깊이 느낀 순간은 발인 날이었다. 운구 차량이 고향 마을을 지날 때 동네 어르신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왔고, 어느새 길가에는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주민들로 가득 메워졌다. 지팡이에 의지한 채 눈물을 훔치는 어르신들을 보며 승우 씨는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마을에서나 집에서나 아버지는 늘 사람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가족들에게도 지식이나 직함보다 사람의 됨됨이와 예의를 강조했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승우 씨가 휴대전화에 아버지를 ‘존경하는 아버지’라고 저장해 둔 이유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적어 서운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공직 생활을 겪어보니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하겠나’라는 마음으로 군북면을 넘어 옥천 전체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거잖아요.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눈물로 배웅하던 주민들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가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다 가셨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은 나눔이 불러온 따뜻한 기적

누구보다 남을 먼저 챙기던 아버지를 보며 자란 덕분에, 승우씨 역시 자연스럽게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살피게 되었다. 그의 나눔은 10여 년 전 군북면 행정복지센터에서 근무하던 시절 시작됐다. 현장에서 마주한 주민들 중에는 제도의 틀 바깥에 놓여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낡은 집에 살면서도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어르신들을보며, 그는 작은 힘이나마 보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침 우수공무원으로 선정돼 받은 포상금 30만 원이 계기가 되었다. 뜻깊은 곳에 써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막상 실천에 옮기려니 망설여지던 그때, 그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함께 근무하던 후배 공무원들이었다. 군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네 명의 직원이 5만 원씩 마음을 모아 군북면에 20만 원을 기탁하는 모습을 보면서 승우 씨도 용기를 얻었다.
처음에는 무더운 여름철 선풍기를 전하거나, 추운 겨울철 난방 연료를 보태는 등 현물 위주의 나눔을 시작했다. 이후 대상자를 선정하고 물품을 전달하는 과정이 쉽지 않아 현재는 매년 추위가 매서운 1월과 더위가 심한 7월에 한 차례씩 현금을 기탁하고 있다. 결코 쉽게 마련되는 돈이 아니다. 매달 용돈에서 10만 원씩 따로 떼어내 차곡차곡 모은 기금이다. 가끔은 그 돈을 다른 곳에 쓰고 싶은 유혹이 스치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스스로를 다잡는다. 그렇게 시작한 나눔은 어느덧 10여 년째다.
“기부는 반드시 큰돈을 손에 쥐거나 성공한 뒤에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분들이 아껴 모은 5만원, 10만 원에 담긴 마음이 훨씬 더 값지니까요. 저 역시 매달 조금씩 모으는 과정에서 흔들릴 때가 있지만 그 유혹을 이겨내며 꾸준히 나눔을 해나가는 것, 그것이 제가 아버지에게 배운 진정한 봉사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가장 흐뭇해하실 선택

아버지가 영면에 드신 후, 가족들은 부의금을 정리하며 고인의 뜻을 가장 아름답게 기릴 방법을 의논했다. 승우 씨는 아버지 앞으로 들어온 부의금 일부를 지역사회에 환원하자고 제안했고, 형제들도 흔쾌히 뜻을 함께했다. 기부처를 정하는 데는 긴 고민이 필요 없었다. 이 전 회장이 40여 년간 몸담으며 남다른 애정을 쏟은 곳이 새마을이었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옥천군 새마을회와 새마을지도자군북면협의회에 각각 100만 원씩 총 200만 원을 전달했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누구보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뻐하셨을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승우 씨는 현재 공직에 몸담고 있어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지는 못하지만, 군북면에서 김치 나눔 같은 봉사 활동이 있을때면 어김없이 고무장갑을 끼고 양념을 버무리며 일손을 보탠다. 퇴직한 이후에는 정식으로 새마을가족이 되어 활동하고 싶은 마음도 품고 있다.
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아버지는 늘 대화의 중심이 된다. 약주를 즐기시던 아버지가 이 자리에 함께 계셨다면 어떤 농담을 건네셨을까 상상하기도 하고, 생전에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아버지의 유산 같은 한마디가 있다. ‘이 바다가 저 바다다.’ 내 마음이나 상대의 마음이나 다를 바 없으니, 언제나 상대의 처지를 먼저 헤아리고 배려하라는 아버지의 깊은 지혜였다. 어린 시절에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넓고 깊은 마음을 이제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고 이승우 씨는 말한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에게 소중한 분이었고, 옥천과 마을을 위해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분입니다. 저 역시 아버지의 이름 석 자에 결코 누가 되지 않도록 살아가고 싶습니다. 지금은 제 자리에서 묵묵히 힘을 보태는 정도이지만, 퇴직을 하고 나면 아버지가 평생 보여주셨던 봉사의 마음을 이어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