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 그 길

글. 편집실



강강술래의 달빛을 따라
진도의 가을을 걷다
전남 진도


둥근 보름달이 차오르는 결실의 계절, 남도 끝자락 진도에는 오래된 가락이 어김없이 울려 퍼진다. 풍요로운 밤 손에 손을 맞잡고 돌던 강강술래의 고장답게, 진도는 걸음마다 문화와 역사의 깊은 숨결이 배어 있는 곳이다. 거센 소용돌이 너머 승리의 기억을 품은 울돌목부터 그윽한 묵향이 번지는 운림산방, 다도해를 붉게 물들이는 황홀한 세방낙조까지. 옛 노랫가락을 따라 걸으며 보배로운 섬 진도가 건네는 가을 이야기를 만나본다.






진도대교 아래 흐르는 명량의 시간
진도대교·울돌목

여행은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진도대교를 건너며 시작된다. 해남과 진도를 연결하는 이 다리는 남도 바다와 고유의 문화예술이 살아 숨 쉬는 고장, 진도로 들어서는 첫 관문이다. 차창 밖으로 시원한 바다가 펼쳐지고, 다리 아래 세찬 물살이 일렁이는 모습을 마주하면 비로소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교각 너머로 굽이치는 바닷길은 명량해협, 즉 우리말로 ‘울돌목’이다. 좁은 병목 지형과 험준한 암초 탓에 조수가 바뀔 때마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고 빠른 물살이 휘돌며 바위가 우는 듯한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최고 유속이 시속 20km에 이를 만큼 거센 물길을 자랑하는 이곳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단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무찌르며 기적 같은 대승을 거둔 ‘명량대첩’의 무대다.
인근 망금산 정상에 자리한 진도타워에 오르면 진도대교와 울돌목, 바다 건너 해남 우수영 일대가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명량의 승전과 호국정신을 기리는 이 타워 주변에는 바다를 굽어살피는 이충무공 동상과 물살체험장이 자리해 있어 당시의 숨결을 차분히 따라가기에 좋다.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명량해상케이블카나 스카이워크에 오르면 투명한 바닥을 통해 발아래로 소용돌이치는 물길을 더욱 아찔하고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다.
초가을 무렵이면 이 일대는 명량대첩축제로 다시 한번 활기를 띤다. 출정 행렬과 해전 재현 공연, 진도아리랑과 강강술래 등 남도의 구성진 가락이 어우러지며 오래전 바다 위의 승리는 오늘의 축제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특히 왜군에게 아군의 병력이 많아 보이도록 여인들이 손을 맞잡고 춤을 추었다고 전해지는 강강술래의 둥근 원무 속에는 단순한 승전을 넘어 나라를 지켜낸 민초들의 지혜와 공동체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명량대첩축제에서 펼쳐진 해전 재현 공연
진도타워에 자리한 이충무공 동상





구름 숲 고택에 번진 그윽한 묵향
운림산방

진도 여행에서 예향의 멋을 가장 온전히 만날 수 있는 장소를 꼽으라면 단연 첨찰산 자락 아래 안온하게 자리한 운림산방이다.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룬다는 이름처럼, 사계절 수려한 산세와 고즈넉한 한옥이 어우러져 한 폭의 수묵담채화 같은 풍광을 자아낸다.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거장 소치 허련 선생의 삶과 예술 혼이 고스란히 깃든 공간이다. 화려한 기교 대신 먹의 그윽한 농담과 선비의 기품을 담아내는 남종화는 허련 선생의 손끝을 거치며 남도의 독보적인 화풍으로 꽃을 피웠다. 스승 추사 김정희가 타계하자 고향 진도로 돌아와 화실을 짓고 여생을 보낸 곳으로, 일가 직계 5대에 걸쳐 200여 년간 화맥이 이어져온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예술의 산실이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와 빼어난 조경의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국가지정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어디서 셔터를 눌러도 그림이 되는 풍경 덕분에 여행객들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진다. 중심에 자리한 네모난 연못 ‘운림지’와 작은 섬, 그 위로 붉게 피어나는 백일홍(배롱나무꽃)은 운림산방의 가장 아름다운 절경으로 꼽힌다. 수면 위로 비치는 첨찰산의 능선과 단아한 초가 화실이 겹쳐질 때면, 마치 살아 숨 쉬는 옛 그림 속을 거니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바람결에 사각거리는 나뭇잎 소리를 벗 삼아 돌담길과 정원을 천천히 걷다 보면, 복잡했던 일상의 마음도 어느새 맑고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경내에 마련된 소치기념관과 진도역사관에서는 허련 선생의 작품은 물론 대를 이어온 남도 화맥의 걸작과 유묵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은은한 묵향이 번지는 고택을 여유롭게 거닐며 남도 전통 회화의 뿌리와 수백 년을 이어온 예술의 결을 가슴 깊이 마주해 보는 것은 어떨까.

백일홍이 핀 운림산방의 고즈넉한 풍경 <출처 : 국가유산청>





하루의 끝, 다도해가 붉게 물드는 곳
세방낙조

세방낙조에서 바라본 해넘이

진도 여행의 하루를 가장 황홀하고 아름답게 매듭짓고 싶다면 섬의 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세방낙조전망대로 향해보자. 전망대로 향하는 해안도로는 국토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이름을 올릴 만큼 목적지에 닿기 전부터 여행자의 설렘을 한층 끌어올린다.
푸른 바다를 곁에 두고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목에서 창문을 열면 시원한 바닷바람과 은은한 갯내음이 차 안으로 밀려들어 남도 최고의 낭만 드라이브를 선사한다.
해안길 끝자락에서 마주하는 세방낙조는 우리나라에서 해넘이가 가장 아름다운 명소로 손꼽힌다. 쪽빛 바다와 다도해의 크고 작은 섬 사이로 붉은 해가 천천히 내려앉으며 숨 막히도록 찬란한 풍경을 연출한다. 특히 공기가 맑고 투명해지는 가을은 낙조의 색감이 가장 짙고 또렷해지는 계절이다. 하늘과 바다가 붉은빛, 주황빛, 보랏빛 등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며 빚어내는 이른바 ‘오색낙조’는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며, 늦은 오후의 서남해 하늘을 단풍보다 더 짙은 노을빛으로 물들인다.
전망대에 서면 손가락섬(주지도), 발가락섬(서면 양덕도), 사자섬 등 재미난 이름을 가진 다도해의 무인도들이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모습이 들어온다. 서서히 붉은 해가 수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면 짙은 먹빛 실루엣으로 남은 다도해와 함께 어둠을 맞이한 바다는 또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인 바다를 바라보며 조용히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 진도대교 아래서 만난 명량의 뜨거운 호국정신, 첨찰산 자락 운림산방에 머물던 그윽한 묵향, 그리고 다도해를 수놓은 오색빛 낙조까지 이어진 진도의 가을 여정은 한 편의 남도 가락처럼 여행이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따스하고 깊은 여운을 전한다.




송가인 - 진도아리랑
진도아리랑은 남도 소리의 흥과 정서를 담은 진도의 대표민요다.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씻김굿, 다시래기 등 다양한 무형문화유산이 전해지는 진도는 예로부터 우리 가락이 깊게 뿌리내린 고장으로 불려왔다.
그중 구성진 가락과 흥겨운 후렴이 어우러진 진도아리랑은 진도 여행의 정취를 친근하게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