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여행

비밀의 정원,
모두의 길이 되다

청남대에서 만나는 여름



푸른 기와의 청와대가 대한민국 권력의 상징이었다면,
‘청와대의 남쪽에 있는 터’라는 뜻을 지닌 청남대(靑南臺)는
대통령의 공식 별장이자, 사적인 시간과 쉼의 공간이었다.
그랬던 청남대가 이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쉼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자연과 역사 그리고 우리 사회의
변화된 가치가 있는 청남대로 떠나보자.

글. 박선우

역사의 베일을 벗고 국민의 품으로

1983년, 대청호반의 수려한 풍경 속에 대통령의 휴식과 국정 구상을 위한 공간인 청남대가 탄생했다. ‘남쪽의 청와대’라 불리며 2003년까지 다섯 명의 대통령이 휴가 기간에 머무른 이곳은 과거 권위와 신비의 상징이었다. 철통같은 경계 속에서 이곳의 사계는 바깥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변화의 바람은 2003년 4월 18일, 권위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진 곳을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정부의 약속이 지켜지면서 청남대는 굳게 닫았던 문을 활짝 열었다. 이는 새로운 관광지가 하나 생긴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최고 권력의 공간이 모든 국민이 함께 누리는 열린 휴식처로 전환된, 소통과 개방의 시대를 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개방 초기 인근 문의면 주민들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5,800여 개의 돌로 쌓아 올린 기념 돌탑은 청남대 개방의 의미를 묵직하게 전해준다. 이제 청남대는 역대 대통령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대한민국 현대사를 돌아보고, 잘 보존된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통령이 걷던 길, 국민의 길이 되다

청남대에 들어서면 잘 가꿔진 조경수와 형형색색의 야생화가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총 184만m2에 이르는 넓은 부지에는 청남대를 찾는 이들이 꼭 들러봐야 할 산책 코스가 마련돼 있다. 본관에서부터 시작하는 ‘오각정길’은 청남대의 대표 정자인 오각정을 거쳐 대청호 수변을 따라 이어진다. 평탄하고 잘 정비돼 있어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누구나 걷기 좋다.
길을 따라 펼쳐지는 호수 전망과 숲의 조화는 자연 속에서 힐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최적의 장소다. ‘민주화의 길’은 본관 뒤편 숲길에서 시작된다. 숲이 우거지고 사람의 발길이 비교적 덜한 이 길은 실제 대통령들이 자주 걸었던 코스다. 고요한 분위기와 함께 묵직한 사색이 어울리는 이 길에서는 청남대의 원래 성격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솔바람길’이라는 이름처럼 소나무 숲이 주인공이다. 굵직한 소나무들이 양옆에 빼곡히 늘어서 있어, 여름에도 시원한 바람과 함께 걷는 기분이 좋다. 숲에서 나오는 피톤치드 향이 진하게 퍼지며 자연치유의 느낌을 더한다.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화합의 길’은 거동이 불편한 이들이나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 추천할 만하다. 길 자체가 짧고 평탄하며, 중간중간 쉬어갈 수 있는 벤치와 쉼터가 잘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통일의 길’은 전망대와 출렁다리로 이어지는 등산코스다. 다소 경사가 있지만, 탑 위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탁 트여 있어 보람이 있다. 통일의 염원과 함께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 길의 이름에 담겨 있다.
비교적 최근 조성된 ‘호반길’은 청남대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호수와 숲이 어우러진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폭의 수채화 같고, 무엇보다 복잡한 생각 없이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는 길이다. 이처럼 청남대의 길들은 단순히 풍경을 즐기는 산책로를 넘어, 대한민국 현대사의 무게와 방향성을 상징하는 의미 깊은 길이다. 대통령이 걸었던 길 위를 국민이 걷는다는 것, 그것은 곧 과거의 권위가 오늘의 공공성과 만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권력의 공간에서 기억의 공간으로

청남대는 본관을 중심으로 다양한 건축물과 상징적 구조물이 조성돼 있어, 방문자들은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역사적 의미와 마주한다. 그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본관이다. 대통령이 실제로 머물며 집무를 보던 공간으로 내부는 당시의 구조와 인테리어를 그대로 재현해 한 시대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오각정은 가장 상징적인 장소다. 오각형 기와지붕의 정자 안에 앉으면 대청호와 청남대 본관이 한눈에 들어오며, 이곳에서 대통령들이 혼자 사색하거나 차를 마시던 풍경을 상상할 수 있다. 중앙에 자리한 봉황탑은 대통령의 기상과 국가의 번영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봉황은 전통적으로 ‘이상적인 군주’를 뜻하는 상징으로, 탑 주변은 인증샷 명소이기도 하다.
역동적인 풍경을 만나고 싶다면, 음악분수 광장으로 향해 보자. 일정 시간마다 클래식 음악이나 대중가요에 맞춰 물줄기가 리듬감 있게 뿜어져 나온다. 숲길로 조금 더 걸음을 옮기면, 곧게 뻗은 메타세쿼이아길이 펼쳐진다. 수십 그루의 키 큰 나무들이 한 줄로 늘어선 이 길은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여유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하나 눈여겨볼 곳은 양어장이다. 대통령들이 낚시를 즐기던 공간으로, 지금은 맑은 연못에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외에도 관람형 전시공간이 풍성하게 마련돼 있다. 대통령기념관은 역대 대통령들의 사진, 어록, 집무 기록 등을 전시해 시대별 정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은 립운동의 정신을 되새기는 공간이다. 또한 청남대 기념관은 이 공간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과정을 거쳐 국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청남대 너머, 여행의 여운을 이어주는 풍경들

청남대를 둘러봤다면 그 여운을 조금 더 이어가고 싶어지는 것이 여행자의 마음이다. 다행히 청남대 인근에는 그 마음을 충족시켜 줄 아름다운 자연과 여유로운 명소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은 단연 대청호다. 청남대를 품은 대청호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인공호수로 여름에는 울창한 숲과 푸른 호수가 어우러져 마치 동화 속 배경처럼 느껴진다. 대청호를 따라 조성된 드라이브 코스는 ‘한국의 숨겨진 절경’으로 손꼽힐만큼 빼어난 풍광을 자랑해 사진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호수 주변에는 간단한 산책이 가능한 둘레길과 자전거 도로도 마련되어 있어 자연을 온몸으로 느끼며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자연과 함께 문화의 향기도 더하고 싶다면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을 추천한다. 대청호 인근 언덕에 자리한 이 작은 미술관은 호수를 내려다보는 전망이 일품이며, 현대미술 전시와 함께 지역 예술가들의 작품을 꾸준히 소개한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잠시 숨을 돌린 후 바로 옆에 자리한 문의문화재단지까지 보는 것을 추천한다. 조선시대 충청북도 지역의 고건축과 민속문화를 재현한 이곳은 한적한 마을 풍경 속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옛 선비들의 정취가 깃든 고택을 걸으며 청남대와는 또 다른 정적인 아름다움을 느껴볼 수 있다.
청남대와 그 주변은 자연, 역사, 예술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공간이다. 당일치기 여행으로는 다 담기 아쉬울 만큼 여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장소들이다. 쉼표가 필요한 여름날, 잠시 속도를 늦추고 청남대 일대를 천천히 걸어보는 건 어떨까. 어쩌면 그 속에서 당신만의 ‘비밀의 정원’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