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을 통해 희망을 나누는
우리들의 이야기
“내 몸이 활동할 수 있는 한 제가 속한 사회를 위해 봉사할 것이고 그 봉사의 밑바탕엔 언제나 새마을정신이 있습니다.”
전북지역 여성 최초로 동장(洞長)을 지낸 정문자 지도자. 그녀는 1940년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나고 자랐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임실군 성수면에서 면서기로 일하는 공무원에게 시집와 산골에서 8년간 남의 땅 2만 평을 개간하고 가축을 키우다 실패를 거듭했다. 당시 정 지도자가 깨달은 교훈은 ‘농업은 이상과 이론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1968년 오류리로 내려온 후 밤나무 2천 그루를 심어 남의 땅을 개간하고 가축을 기르다 진 빚을 다 갚았다.
그녀는 오류리 새마을 여성지도자로 활동하며 ▲가난 없는 마을 ▲배우고 가르치는 마을 ▲가족계획과 생활개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을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을 등 오류리 이상촌 건설 목표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당시 진행되던 새마을운동의 방향을 근간으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다른 마을과 달리 동네 특성에 맞는 목표(目標)를 정하고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오류리 새마을운동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어린이 공부방 설치와 학교에 못 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중학교 과정 설치 등이 그 예다. 이런 활동으로 그녀는 1974년에 대통령 훈장을 받았고 장관 표창, 도지사 표창을 수없이 받았다.
정 지도자는 1977년 친정 부모님 병간호를 위해 전주로 이사를 해야 했지만, 1979년까지 2년간 임실지회장을 더 맡아서 활동했다. 이후 전라북도새마을회 사무국이 생기면서 도지부 초대 부녀국장을 맡아 1993년 초까지 사무국 일을 하게 된다. 김영삼 정부 시절 인구 50만 명 이상의 도시에는 여자 동장을 최소한 1명 이상 발령을 내라는 대통령 지시가 내려졌다. 자격으로는 행정공무원 6급으로 5년 이상 근무한 자, 지방의회 의원 경력 4년 이상인 자, 새마을 군지회 회장 경력 5년 이상인 자 등이었다.
전주시는 의회나 공무원 사회에서는 그런 자격을 갖춘 여성이 없었다. 그래서 새마을운동 출신 중에서 후보를 물색하게 됐고 정 지도자가 물망에 올랐다.
1993년 7월1일 전북지역 최초의 여성 동장은 그렇게 탄생했다. 동장을 하면서 처음에는 두려움이 앞섰지만, 그녀는 ‘새마을운동식’으로 일하면서 자신감을 얻게 된다. 새마을운동식이란 열심히 뛰고, 부지런히 일하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태도를 갖는 것이다.
전주시의 5대 시책(市策)을 새긴 명함을 들고 동민들을 일일이 방문하고 다니니 “부지런하다”는 칭찬을 듣게 됐고, 거리 청소에 신경을 쓰다 보니 “여자 동장이 오니 골목길이 깨끗해졌다”는 소릴 듣게 됐다. 그녀의 초임지인 풍남동 사무소가 전주시에서 알아주는 ‘친절한 동사무소’가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여성 동장이 이끄는 풍남동사무소가 호평을 받자, 전주시는 아예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동사무소를 시범적으로 설치하고 그 책임자로 정 지도자를 내정했다. 1995년 6월 사환에서 동장까지 여성으로만 구성된 시범 동사무소가 중노2동에 설치됐다. 그녀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가 실패하면 여성 공무원의 미래는 암울해진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일을 했다. 그 결과 42개 동 중 평가가 늘 꼴찌였던 중노2동이 3위로 뛰어오르는 성과를 일구어냈다.
정 지도자는 동장에서 퇴임 후 다시 새마을운동을 하게 된다.
1998년 새마을부녀회 후원회원들의 모임인 백일홍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2009년부터 지금까지 새마을중앙연수원 외국인 교육 사례 강사로도 활동 중이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새마을지도자들의 생생한 활약상을 통해 그들의 리더십과 당시 마을 단위별 새마을운동의 성공사례를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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