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 그 길

글. 편집실
사진. 한국관광콘텐츠랩
박장용



수국 향기 따라 흐르는 고래의 노래
울산 장생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업 도시로 자리 잡기 훨씬 이전, 울산은 바다와 고래가 숨 쉬던 도시였다.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온 사람과 고래의 인연은 단순한 생존의 이야기를 넘어, 시간의 깊은 결 속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파도 위를 유영하던 거대한 생명과 그것을 바라보던 인간의 시선은 서로를 기억하며, 시대를 건너 또 다른 이야기로 피어나고 있다. 그렇게 울산은 지금도 오래된 기억 위에 새로운 신화를 한 겹씩 덧입히며 살아 숨 쉬고 있다.






인류 최초의 고래사냥 기록
울산 반구대암각화

고래조각정원

오늘날 고래는 신비의 대상이자 보호해야 할 존재로 여겨지지만,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울산 사람들에게 고래는 생존과 직결된 중요한 자원이었다. 오늘날 국내 최대의 공업 도시로 알려진 울산은 산업화 이전 국내 최대 규모의 포경 산업 도시로서 번성했던 곳이다. 1899년 러시아가 태평양 연안에서 포획한 고래를 해체하는 포경 기지로 장생포를 지정하면서, 울산은 고래잡이의 전진기지로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후 장생포 일대는 고래 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하며 지역 경제와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울산과 고래의 인연은 이보다 훨씬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 최초의 고래 사냥 기록이 바로 이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202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는 귀신고래, 혹등고래, 긴수염고래 등 다양한 고래의 모습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작살을 맞은 고래, 여러 사람이 함께 배를 타고 사냥에 나서는 장면 등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그림들도 함께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암각화는 단순한 그림을 넘어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과 지혜, 그리고 협력의 흔적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선사시대 울산에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들은 바다로 나아가 거대한 자연의 힘에 맞서 고래를 사냥하고, 이를 통해 식량과 자원을 확보하며 공동체를 유지해 나갔다. 고래는 단순한 사냥의 대상이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존재이자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중요한 매개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오늘날 울산이 지닌 고래 문화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동해바다로 고래를 찾아 떠나겠다는 송창식의 노래 ‘고래사냥’은 고래도시 장생포를 떠올리게 한다.
선사시대부터 이어져온 울산과 고래의 인연은 그 모습을 바꿔가며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고래의 과거와 현재의 만남
장생포고래박물관과 고래생태체험관

울산암각화박물관 ⓒ김지호

울산 남구 장생포항은 한때 고래잡이로 이름을 떨쳤다. 고래잡이가 전성기를 이룬 1970년대 말에는 20여 척의 포경선과 1만여 명의 인구가 상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에서 상업포경 금지를 결정하면서 고래잡이가 중단되고 장생포는 점점 쇠퇴하였다.
시대가 바뀌어 이제는 더이상 포경선이 드나들지 않지만 장생포는 여전히 고래의 도시다. 국내 유일의 고래 전문 박물관인 장생포고래박물관을 시작으로 고래생태체험관, 고래문화마을 등 고래의 생태와 문화를 폭넓게 체험할 수 있는 고래관광 인프라를 갖춘 테마 관광지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장생포고래 박물관은 고래와 인간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공간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먼저 거대한 고래의 골격에 압도당하고, 고래잡이의 과정을 재현한 전시를 통해 그 당시의 고래산업의 현장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고래와 함께 번성하고, 또 저물어버린 고래산업의 역사를 통해 변화된 인식과 해양 보호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배움의 장이 되어준다.
고래의 과거를 만나봤다면, 이제 살아 있는 고래를 만나볼 차례다. 장생포고래박물관 바로 옆에 자리잡은 고래생태체험관은 유적으로 가득했던 박물관과 달리 살아 있는 해양생물을 직접 만나보고, 또 돌고래가 유영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만나볼 수 있다. 마치 바닷속을 탐험하는 듯한 해저터널과 다양한 체험형 콘텐츠가 마련되어 있어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장소다.

장생포 고래문화마을





바다빛과 꽃빛이 함께 일렁이는
장생포 고래마을

울산의 장생포옛마을은 실제로 고래잡이가 이루어지던 삶의 터전을 역사와 추억으로 되살려 이야기를 건넨다. 번화했던 장생포 고래잡이 어촌의 옛 모습을 재현한 골목에서는 당시 주민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골목마다 정겨운 간판과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어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시간여행을 온 듯 짙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아마 그 시절, 거친 바다에서 고래와의 싸움을 마치고 돌아온 어부들은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고된 일상을 씻어냈을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신화가 아닌, 살아 숨 쉬는 고래를 잡으러 동해로 나갔을 것이다.
이곳의 매력은 계절이 더해질 때 더욱 빛난다. 초여름 장생포 일대는 화사한 수국으로 물든다. 언덕과 산책로를 따라 가득 피어난 수국은 마치 바다와 경쟁하듯 온 마을을 푸른빛으로 채운다. 바다의 깊은 청색 위에 보라색과 분홍색의 수국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은 장생포에 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올해도 어김없이 6월이면 장생포에는 수국이 가득 피어날 것이다. 수국이 만개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고래의 이야기가 조용히 우리 곁에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