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종

새마을운동을 통해 희망을 나누는
우리들의 이야기

2023 03·04 제7호

1. 농업기계화   2. 메탄가스 시설   3. 농업용수 시설   4. 간이 급수 시설   5. 전기·통신

새마을 아카이브

마을 주민의 자립정신과
실천의지를 독려한 새마을운동

중앙·지방 행정부처가 생산한 기록물 편

한국 농업문제 전문가이자 전 아시아재단 대표인 에드워드 리드(Edward Reed) 박사는 “새마을운동은 공무원-농민의 힘 관계를 농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크게 변화시켰다”라고 말한 바 있다. 새마을운동은 ‘중앙→도→시군→읍/면/동’으로 이어지는 각 행정 단위의 역점 사업으로 추진되었으나 그 운동의 주체는 마을 주민이었다. 정부는 지원자의 입장에서 주민의 활동을 돕는 데 중점을 두고 자립정신과 실천의지를 독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우수마을 우선 지원’이라는 원칙 아래 맞춤형 지원을 전개했는데, 충청남도의 새마을 지원사업을 보면 기초마을에는 환경개선을 위한 시멘트와 철근을 지원하고, 자조마을에는 농로개설과 지붕개량 지원, 자립마을에는 노임사업·생산기반사업·문화복지사업을 지원하는 식이다. 이처럼 중앙정부는 관계 부처들이 참여하는 협력 기구를 조직하여 정책을 마련했고, 지방정부는 그에 관한 구체적인 지침을 마련하여 마을에 전달했다.
읍면 단위 공무원들은 주민의 지도자인 이장·새마을지도자와 긴밀히 소통하여 새마을사업에 필요한 정보와 기술을 제공하고 추진 현황을 점검했다.

새마을 운동은 1970년부터 시작된 ‘잘살기 운동’이다. 활동은 문서와, 슬라이드, 녹음테이프, 영화 필름으로 제작되었다.
특히 성공적인 농촌 부흥의 원형을 보여주는 기록유산으로써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6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2023년 ‘새마을 아카이브’ 코너에서는 한국 농촌 근대화의 실록인 새마을운동기록물을 주체별로 나누어 소개하고 가치와 의의를 전하고자 한다.

새마을운동,
살아있는 전설

하사용 지도자

한국의 ‘새마을운동 성공사례 1호’인 하사용 지도자. 1970년대 당시 전국의 새마을지도자들에게 ‘하면 된다’라는 자신감을 준 하사용 지도자를 만나 최근 근황을 들어봤다.
“하면 된다! 이거여. 나만 잘 사는 게 아니고, 같이 잘 살아야 할 거 아니여. 정신을 바꾸지 않고는 희망이 없는겨”라고 말하는 하사용 지도자(94세).
하사용 씨는 1930년 4월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에서 태어났다. 가난했던 그는 수업료를 못내 초등학교 2학년 때 퇴학을 당하고 고물수집, 엿장사, 나무장사, 채소장사 등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했다. 채소장사를 하면서 채소농사를 짓는 화교(華僑)들의 수입이 높다는 것을 보게 된 그는 부농(富農)의 꿈을 꾸게 됐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채소 같은 고소득 농사를 짓지 않는지 의아했지만 그로서는 농사를 지을 땅이 한 평도 없었다.
6·25전쟁이 나자 그는 강원 양구지구 전투에 참전을 했다가 폐결핵으로 의병 제대를 했다. 제대 후 오창면 상평리의 신경복 씨와 냉수 한 그릇 떠놓고 결혼식을 올렸다. 움막집과 홑청 없는 이불 한 채가 신혼부부의 살림 전부였다.
채소농사를 짓기 위해 땅을 빌리려 해봤지만 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내 몰래 집을 나와 걸식을 해가며 춘천의 부잣집에 서 3년간 머슴살이를 하고, 새경 쌀 열다섯 가마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사용 지도자에게는 허투루 사용되는 물건이 하나 없다.
철 지난 달력이나 이면지 등을 활용해 편지봉투를 직접 만들어 사용 중이라며, 하사용지도자표 편지봉투를 선물로 주셨다.

1957년에 쌀 열다섯 가마로 밭 270평을 구입했다. 그 밭 한 켠에 두 평 남짓한 움막을 지었다. 처음 가져보는 내 땅과 집이었다. 미친 듯이 일만 했다. 남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농사를 지어서는 성공할 수 없었다. 밭에 채소를 심은 후 콩기름을 바른종이를 씌워서 보온을 해주었다. 국내 최초였다.
이는 훗날 최초의 비닐하우스 원예작물 재배로도 이어졌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는 남들보다 채소를 일찍 수확할 수 있었고, 일반 농사보다 열 배 이상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땅을 더 사기 위해 1원도 헛되이 쓰지 않았다. 저축으로 매년 땅을 늘렸다. 또다시 결핵이 찾아왔지만 그는 다시 한 번 이겨냈다. 1970년 11월 11일 전국 농어민 소득증대 경진대회장에서 대통령으로부터 동탑산업훈장을 받는 ‘전국 1등 농민’이 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포상금으로 1,000만 원을 지급하려했다. 1,000만 원이면 당시 20,000평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하지 않고 부자가 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에 이를 받지 않았다.
그는 비닐하우스 시설재배의 일인자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기재배, 촉성재배, 보온시설재배 등 시설재배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곧 입소문이 퍼져나갔다. 멀리서 개인 혹은 단체 단위로 견학 겸 실습을 하러오는 농민들이 급증했다. 이때부터 전국 곳곳에서 비닐하우스를 쉽게 볼 수 있게 됐다.
하사용 지도자는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3,500회 이상 강의를 했다. 국내뿐 아니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몽골 등 개발도상국에서 새마을운동을 배우려는 이들이 대상이었다. 그의 일대기는 2007년 중국에서 소설로 출간돼 중국 전역의 농촌지도자에게 배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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