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 그 길

글. 장유정
사진. 제천시청, 한국관광콘텐츠랩



서두르지 않아도 봄은 내게 와 안긴다
충북 제천시


제천의 봄은 빠르지 않다. 걷는 속도를 조금만 늦추면 제천은 더 큰 봄을 품에 안겨준다.
의림지의 물빛과 청풍호의 벚꽃길, 배론성지의 고요는 천천히 다가와 하루를 봄으로 가득 채운다.






노송의 그늘이 만든 물의 시간
의림지과 제림

제천은 산이 둘러싼 분지 지형 덕분에 소리가 한 겹 걸러져 들어오는 도시다. 그 조용함이 가장 먼저 닿는 자리에 의림지가 있다. 의림지는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3대 저수지로 꼽힌다. 그중에서도 의림지가 특별한 이유는 지금도 논에 물을 댄다는 것. 천 년을 훌쩍 넘긴 저수지가 박물관이 아닌 현역으로 살아있다는 사실이 이 호수를 단순한 명승지와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한다. 2006년 명승 제20호로 지정됐고, 제천10경의 첫 번째로 꼽히는 것도 그 무게 때문일 것이다. 의림지를 감싸는 제림은 제방 위에 조성된 숲으로, 수백 년 묵은 노송이 주종을 이루고 버드나무·전나무·은행나무·벚나무 등이 함께 자라 계절마다 다른 밀도를 만든다. 봄이면 수양버들과 벚꽃이 겹쳐지며, ‘수풀 림(林)’ 자가 의림지의 이름에 남은 이유를 제방 숲의 존재에서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과거 제방을 튼튼히 하고 토양 유실을 막기 위해 심었다는 소나무들은 이제 시간이 만든 그늘을 호숫가에 길게 드리운다.
의림지의 둘레는 2km 남짓, 그런데 막상 호숫가에 발을 들이면 길지 않은 이 길이 하루의 속도를 바꾼다. 솔숲과 물의 기운이 맞물린 길을 따라 걷는 동안 이곳은 관람 코스가 아니라 여유를 회복하는 산책에 가까운 자리라는 걸 몸이 먼저 알아챈다. 물 위로는 바람이 먼저 스치고, 제림에서 잘게 부서진 빛이 수면으로 흘러들어 같은 풍경도 시간마다 다른 색으로 갈아입는다. 비가 한 차례 지나간 다음 날, 제림의 흙내가 짙어지는 순간엔 풍경이 시각을 넘어 후각까지 끌어당긴다. 솔향과 물, 그리고 흙냄새가 코끝을 지나 숨 깊은 곳까지 내려와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준다. 호수 곁에 자리한 의림지역사박물관은 의림지의 역사와 축조, 농경문화의 맥락을 덧대어, 방금 걸어낸 풍경을 도시가 물과 함께 살아온 시간으로 이어준다. 결국 의림지는 제천 여행의 서문이다. 제천의 여행은 꽉 채워지는 경험이 아닌 여백의 누적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가장 조용하고도 단정하게 보여주는 곳이 의림지다.

물에 비치는 풍경이 아름다운 의림지


손빈아의 노래 ‘집에 가는 길’ 가사에는 ‘울고 넘는 박달재’가 등장한다.
박달재는 충북 제천 구학산과 시랑산을 잇는 고개로, 박달도령과 금봉이 처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노래의 애절한 정서와 목소리는 박달재에 깃든 애타는 마음을 한층 선명하게 떠올리게 한다.





봄이라 꽃인지, 꽃이라 봄인가
청풍호반 케이블카

의림지의 잔잔함을 품고 청풍호로 방향을 틀면 풍경은 단숨에 대화면으로 전환된다. 호수는 내륙의 바다처럼 넓게 펼쳐지고, 산 능선은 물을 안쪽으로 접어 넣듯 둘러서며 겹겹의 윤곽을 만든다. 그 겹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펼쳐 보이는 장치가 청풍호반 케이블카다. 케이블카는 청풍면 물태리에서 비봉산 정상까지 2.3km 구간을 오가며, 물태리역과 비봉산역 사이를 10인승 캐빈 46대가 운행해 정상까지 약 9분 만에 닿는다. 캐빈이 고도를 올릴수록 물빛은 한 톤 옅어지고 산의 주름은 더 선명해진다. 정상에 닿는 순간 바람이 먼저 인사를 건네고, 그 다음에야 풍경이 천천히 따라오는 듯하다.
봄에는 여기에 ‘길’이 더해진다. 청풍호의 봄은 꽃으로 물들다 못해 길 전체가 꽃길이 된다. 금성면 청풍호 입구부터 청풍면 소재지까지 약 13km 구간에서 이어지는 청풍호 벚꽃축제는 여행자의 마음까지 핑크빛으로 물들인다. 차로 스쳐 지나가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한 구간이라도 내려 걷는 순간 꽃길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호반도로가 벚꽃 터널로 변하는 시기에는 이동 자체가 벚꽃 나들이가 되고, 호수의 푸른빛은 봄의 색과 어우러져 계절과의 사랑에 빠지게 한다. 케이블카를 먼저 타고 위에서 내려다본 뒤 벚꽃길을 걸으면 ‘위에서 본 봄’과 ‘곁에서 만난 봄’이 한 장면으로 이어지고, 반대로 벚꽃길을 먼저 지나고 케이블카에 오르면 같은 호수가 더 넓게, 더 깊게 느껴진다. 시선의 높이가 바뀌면 감정의 결도 함께 달라지기 때문이다. 여행자가 할 일은 온몸으로, 두 눈 가득 청풍호가 가져다준 봄의 생기를 받아들이는 것 그뿐이다. 그렇게 청풍호는 보고 지나가는 풍경이 아니라, 한동안 마음에 머물며 계절을 되살려주는 장면으로 남는다.

울고 넘는 박달재를 소리쳐 부르며
한 잔 술에 취한 몸은 집으로 가는데
어두워진 골목 길 돌아서니 외로운 가로등 하나
취한 눈 크게 뜨고 바라보니
불 꺼진 내 창가엔 달빛 내리고
옛사랑 순이가 보고싶구나
철없던 시절 내 곁을 떠난 그대
사나이 가슴에 추억을 남겨준
그대는 나의 첫사랑이었어

- 손빈아, <집에 가는 길> 중에서






봄의 고요가 남긴 진리
배론성지

배론성지
성 요셉 신학당

하루의 끝은 소리를 낮춘 고요한 곳에 두는 편이 좋다. 배론성지는 숲과 골짜기 안쪽에 자리해 들어서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달라지고, 말보다 숨이 먼저 정리되는 쪽으로 마음이 이동한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신자들이 몸을 숨길 곳을 찾아 배론으로 모여들었고, 그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천주교 신자촌이 형성되며 성지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곳을 대표하는 서사는 황사영 백서 토굴이다. 배론성지 자료에 따르면 1801년 신유박해 당시 황사영은 8개월 동안 토굴에 머물며 중국 북경교구장에게 편지를 썼고, 명주천(가로 62cm·세로 40cm)에 세필로 122행 13,384자를 남겼다. 그러나 현장에서 먼저 체감되는 것은 편지의 ‘가치’보다 그 시간을 견딘 사람의 ‘호흡’이다. 순례길 안내 표지판에는 ‘묵묵히, 천천히, 깊게 걷는 길’이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묵묵히 걸으며 나를 돌아보고, 천천히 걸으며 사람과 이웃을 돌아보며, 깊게 걸으며 나를 떠나고, 깊게 걸으며 나를 만나는 길. 그래서 이곳에서는 ‘많이 보기’보다 ‘천천히 걷기’가 더 중요해지고, 정돈된 조경과 건물의 선, 숲길의 경사가 관람의 리듬을 만든다. 사진은 필요할 만큼만 남기게 되고, 멈춰 서는 시간이 오히려 길어진다. 더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 떠난 여행의 끝에서 남는 진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결국 나를 돌아보고, 사람과 이웃을 돌아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의림지의 물빛에서 시작된 봄은 청풍호의 하늘 아래서 한 번 더 커지고, 배론의 고요에서 잠잠해진다. 그렇게 제천의 물, 바람, 꽃은 하루치 위로가 되어 마음에 포개진다. 제천은 이렇게 봄의 사랑을 조용히 내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