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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은 1970년부터 시작된 ‘잘살기 운동’이다. 활동은 각종 문서와 편지, 성공사례 원고, 사진과 영상 등으로 제작됐다. 새마을운동기록물은 성공적인 농촌 부흥의 원형을 보여주는 기록유산으로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6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2024년 ‘새마을 타임즈’ 코너에서는 한국 농촌 근대화의 실록인 새마을운동기록물 중 만화 이야기를 각색해 전하고자 한다.
새마을 타임즈
다시 보는 새마을운동 이야기 ep. 4
굴하지 않는 신념으로
마을을 변화시킨 개척자
인천 옹진군 선재도 오성철 지도자
인천 옹진군의 작은 섬 선재도는
금빛 낙조가 아름답고 육지와 연결된 다리가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1960년대 이곳은
바지락 채취와 보리·감자 농사로
겨우 생계를 유지했던 낙후된 섬 중의 하나였다.
그런 섬마을을 불과 8년 만에
부유한 마을로 바꿔놓은 한 남자가 있다.
바로 4전 5기의 정신을 보여준 오성철 지도자다.
일러스트. 정재은
멈추지 않는 용기, 끝없는 도전
1934년 황해도 벽성군 청용면 용매리라는 작은 어촌에서 태어난 오성철 지도자. 어린 시절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인천 옹진군으로 오게 된다. 힘겨운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교회 목사의 도움을 받아 신학대학에 진학했고, 1958년 군 복무를 마친 후 인천 옹진군 선재도에 정착한다. 종교 활동으로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큰 꿈을 꿨지만, 당장 마을에 필요했던 것은 가난한 삶을 변화시킬 농촌계몽운동이었다. 오성철 지도자는 계몽운동 사업자금 마련을 위해 ‘꽃게 축양사업’에 나섰다. 운 좋게 투자자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으로 마을 개발사업을 벌인 오성철 지도자는 재건국민운동본부장 표창도 받았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강추위로 꽃게 축양사업은 빛을 보지 못했고, 이어 재기를 위해 시작한 연탄사업도 실패했다. 1963년에는 꽃게 축양장을 염전으로 전환해 1,500가마니의 소금을 생산하는 성과를 이뤄냈으나 투자자를 잘못 만나 이내 접어야 했고, 이듬해 정미소 사업에도 도전했지만 안타깝게도 화재가 발생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오성철 지도자가 아니었다.
새마을정신으로
마을의 기적을 이루다
“근면, 자조, 협동하는 새마을정신이 생활화되면 이루지 못 할 것이 없습니다.”
1970년 전국적으로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오성철 지도자는 마을 주민들의 요청으로 어촌계장직을 맡는다. 마을 개발사업을 성공시키지는 못했으나 농촌계몽을 향한 열의만큼은 누구나 인정했기 때문이다. 오성철 지도자는 고심 끝에 굴 양식 사업을 제안했다. 지역 조건상 굴 양식이 어렵다며 일부 주민들이 반대했지만, 그는 직접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추운 겨울에도 뜻을 같이하는 몇몇 주민과 협동해 3ha(약 9,000평)의 굴 양식장을 조성했고, 3개월 만에 4톤을 수확했다. 모든 주민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성철 지도자는 협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했고 주민들은 쓸모없던 갯벌 45ha(약 13만 6,000평)를 굴 양식장으로 개간했다. 또 40ha(약 12만 평)의 바지락 양식장도 조성해 마을의 경제적 기반을 더욱 튼튼히 다졌다. 마을 소득은 1971년 호당 60만 원에서 3년 만에 100만 원으로 증가했다. 오성철 지도자의 지도력과 주민들의 협동정신으로 마을은 가난에서 벗어나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지역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여러분이 힘을 합쳐 ㉭㉢㉨㉦으로 일하면 일도 빠르게 진행되고 능률도 높아지고, 소득도 향상됩니다. 소득이 향상되면 자조자립의 기반이 조성되고, 그 기반으로 근면과 저축하면 함께 잘살 수 있는 마을이 될 것이오. 그 길이 새마을운동입니다.”
협동과 결속이
풍요와 번영을 이끌다
이어 오성철 지도자는 어촌계장으로서 조합 지도층의 결속을 다졌고, 해태 양식 시험사업, 굴채묘 시험사업 등을 통해 마을을 더욱더 잘사는 곳으로 변화시켰다. 주민들은 노력만 하면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이 더 커졌고, 부녀자들까지도 새마을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특히 부녀회는 마을에서 선착장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목을 확장하는 공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눈을 의심할 정도로 마을이 발전하자 주민들은 삶의 희열을 느꼈다. 이어 지붕 개량, 마을회관 및 새마을회관 건설, 탁아소 운영, 전기와 수도 가설, 대형어선 및 공동운반선 마련, 농지 개간, 양식사업 확장, 목장 건설 등 다양한 사업이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그 결과 1977년 선재도 호당 소득은 810만 원을 기록했다. 그해 10월 오성철 지도자는 지역발전과 소득증대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으로부터 새마을훈장 협조장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신념으로 도전한 그의 집념이 결국 새마을정신으로 꽃 피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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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철 지도자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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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트. 『바다사나이』(1978년)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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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① 행동지속
  • ② 협동정신
  • ③ 합동전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