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은 1970년부터 시작된 ‘잘살기 운동’이다. 활동은 각종 문서와 편지, 성공사례 원고, 사진과 영상 등으로 제작됐다. 새마을운동기록물은 성공적인 농촌 부흥의 원형을 보여주는 기록유산으로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6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2024년 ‘새마을 타임즈’ 코너에서는 한국 농촌 근대화의 실록인 새마을운동기록물 중 만화 이야기를 각색해 전하고자 한다.
새마을 타임즈
다시 보는 새마을운동 이야기 ep. 3
새마을정신과 지혜로
잘사는 공동체를 이루다
경기 포천시 가산면 우금1리 이강규 지도자
가난과 흉년으로 살기 어려웠던 우금1리가
새마을사업 시작 3년 만에 자립을 이루고,
1977년 호당 평균 소득 183만 원을 기록하며
부자 마을로 거듭났다.
놀라운 점은 동전 한 푼 모으지 않고,
오로지 주민들의 성실함과 노력
그리고 슬기롭고 헌신적인 지도자의
리더십만으로 이뤄진 결과라는 것이다.
#1.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한
공동체 정신
남의 집 곁방에서 태어났을 만큼 가난한 집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이강규 지도자. 소아마비를 앓으며 몸이 불편했지만 학창 시절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고, 장학금을 받으며 서울 숭실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편하게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지만, 야간에 문맹자를 가르치며 한글 계몽운동에 나섰다.
“장학금으로 하숙하며 편하게 나 혼자만 공부할 게 아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사범대학을 거쳐 1963년 풍문여자중학교 교사가 되었고, 뜻 있는 일을 하고자 서울 구로동 빈터에 천막 교실을 만들어 청소년 중등 구락부*도 운영했다. 교사 봉급은 몽땅 구락부 운영비로 지출했다. 비록 천막 교실이었지만 직접 연주회와 연극을 열거나, 교지 〈앞날〉를 발간하면서 300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구락부: 동호회 또는 동아리, 클럽의 일본식 표현
#2. 살기 좋은 삶의 터전을 위한
농촌계몽운동
잠시 고향에 돌아온 어느 날, 이강규 지도자는 흉년을 버티다 못해 한평생 살아온 삶의 터전을 떠나는 주민을 마주친다. 이를 안타깝게 본 이강규 지도자는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겠다며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촌계몽운동에 나선다. 그는 1970년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새마을지도자로 선출됐고, 마을 조직을 만들어 다양한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던 중 마을에 교량과 제방을 만들라며 군청에서 시멘트 550포와 철근을 1톤이 내려왔다. 문제는 공사에 필요한 자금이 없었다는 것. 이강규 지도자는 기발한 대안을 제시한다.
“마을 개울에는 자갈(골재)이 무진장 묻혀 있소! 여러분은 주워 모으기만 하시오.”
주민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개천에 나가 자갈을 모았고, 이를 팔아 공사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 그렇게 주민들과 합심해 포천에서 제일 큰 ‘마치미교’를 완공했다.
# 3. 주민의 자조 정신을
일깨운 지도자
다리를 만든 우금1리 주민들은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새마을회관과 공동목욕탕 건설, 수도 가설, 지붕 개량 사업 등을 이루면서 마을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퇴비증산 운동 때는 목표량의 341%(약 1,572톤)를 달성하며 경기도에서 우승해 포상금을 받았다. 이강규 지도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소득 증대사업과 마을기금 조성에 나선다.
“새마을 사업이란 주어진 여건을 연구하고, 부존자원을 협동으로 개발해 소득을 높이는 데 참뜻이 있습니다.”
먼저 우금 저수지에 유료 낚시터를 개장하고, 산림계와 흥농계를 조직해 공동사업을 운영하며 소득을 높였다. 기금이 마련되자 마을회관을 3층 다목적종합회관으로 확장하고 회의실, 도서실을 만들었다. 가난했던 마을이 자립을 넘어 10여 년 만에 쾌적한 주거 환경과 문화시설을 갖춘 부자 마을이 됐다. 이 모든 것이 새마을정신으로 주민들을 일깨운 이강규 지도자와 마을주민들의 노력과 희생과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